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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좌절과 한탄(욥3장)

[레벨:11] 관리자, 2018-01-12 08: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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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장입니다.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3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6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7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20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욥은 갑작스럽게 당한 끔찍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재난이 너무나도 극심한 것이어서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범죄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좌절을 느끼고 그것을 한탄하였던 것입니다. 본장은 좌절한 욥의 한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좌절과 한탄의 배경과 원인

1) 극에 달한 환난

욥은 그가 가졌던 양 칠천 마리와 약대 삼천 마리, 소 오백 마리, 그리고 암나귀 오백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종과 가족, 건강과 명예도 잃었습니다. 한마디로 욥은 그의 존재를 지탱하고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던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보충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고통은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상황 가운데 있는 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한탄조차 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기뻐할 수 있다면 그는 참으로 온전한 사람입니다.

2) 위안을 바라는 마음

사람은 환난에 빠졌을 때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일단 약해지면 남으로부터 동정을 받고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욥도 극심한 재난에 처하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 시험으로 인해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심지어 그를 가장 잘 이해해 주어야 할 아내가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욱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먼 곳으로부터 그의 세 친구가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해 방문하자, 욥은 억울한 고난으로 인한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 줄 사람들이 왔다고 생각하고 억제했던 자신의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처럼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인 것입니다.

3) 무고한 환난을 받는다는 의식

만일 욥이 자기가 지은 죄악으로 인해 고난을 받았다면 본장의 내용과 같은 한탄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자신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를 행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신의 생을 저주한 것입니다. 본서 후반부에서 밝혀지지만 욥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욥이 제아무리 의롭게 산다 할지라도 그는 본질적으로 죄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시험에서 면제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중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참조, 3:10,18). 따라서 이 세상에서 받는 그 어떠한 고난이나 시험도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2. 생에 대한 저주의 세 단계

1) 아예 태어나지 않음

3:2-10의 내용은 욥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자신의 출생 준비 기간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욥은 그가 출생하기 이전의 날들과 빛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이 세상에 아예 태어나지도 않을 수 있었으며, 그렇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 현재와 같은 고통은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욥의 절망은 이처럼 깊었던 것입니다.

2) 죽어서 태어남

설령 출생하기 이전의 날들이 있었고 빛이 있어 잉태되었다 할지라도 태어나지 못하고 죽는 태아들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바로 그런 운명의 태아들 사이에 있었더라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함으로 이 세상에서 겪는 현재의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음에도 그의 고통이 너무 크고 깊었기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그의 염원을 이와 같은 염세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3) 지금이라도 죽기를 희망함

욥은 처음에 그가 잉태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노래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잉태되었더라도 태중에서 죽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것으로라도 행복했을 것을 노래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로, 그는 설령 잉태되는 날이 있었고 그 잉태로 인해 태어났을지라도 고통을 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라도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욥은 현재의 고통이 너무도 크므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염세주의와 그리스도인

1) 피해야 할 파괴적 염세주의

소포클레스로부터 시작하여 쇼펜하우어, 까뮈 등의 철학자들에게서 꽃피운 염세주의 철학은 인간의 생 자체를 저주하는 동시에 인간의 생을 인간이 좌지우지하려는 인본주의 철학입니다. 염세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부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도 거부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취할 사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하나님의 창조를 불의하고 의롭지 못한 것으로 보며 현재의 모든 삶도 부조리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염세주의는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죄악된 세상을 선별적으로 거부하는 건설적 염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모든 염세주의가 아니라 철학적 염세주의이며 인본주의적인 파괴적 염세주의입니다.

2) 받아들여야 할 초세상적 염세주의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본래에는 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악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죄악으로 그 영안이 어두워진 인간은 존재의 수단인 피조 세계를 숭배 대상으로 오인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피조물이 인간을 멸망으로 이끄는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피조 세계를 극복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잠시 이 세상 것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세, , 엘리야 및 전도서의 염세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나는 염세주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그리고 이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 의에 이르기 위해 이 세상에서 떠나가기를 구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 대해 이중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인 동시에 현세에서의 삶의 복락을 제공하는 선한 수단으로 보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올무로 보는 것입니다. 이 두 사상을 바르게 가지고 바르게 적용해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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