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3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
4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5 너희가 나를 보면 놀라리라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6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8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9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10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11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12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3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14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15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16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이며, 악인이 결코 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논지의 지적을 계속 들은 욥은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합니다.
내 말을 좀 들어달라(1~6절)
욥은 친구들이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그는 친구들이 논리적인 말로 자신을 설득하려는 태도에 전혀 위로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전혀 주의 깊게 듣지도 않고,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는 친구들에게 제발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것이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도 않고 조롱하는 친구들에게 일단 자신의 말을 다 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을 원망하거나 친구들과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답을 얻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그 상황 앞에서 그의 마음은 조급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제발 이 상황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자신을 정죄하는 말을 그쳐 달라고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의 고난을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욥을 향해 입을 다물라고 말했고, 욥도 친구들에게 입을 다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침묵하셨습니다(사 53:7). 예수님이 잠잠히 고통을 감내하신 이유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우리는 복된 하나님 백성입니다.
나는 악인이 아니다(7~16절)
앞서 소발은 지식을 자랑하며 자기가 아는 사실은 사람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정해진 진리라고 주장했습니다(20:4). 그는 그때부터 악인은 틀림없이 패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욥은 그 주장에 대해 실제적 반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악인들은 잘 살고 오래 살며 강성한 힘을 유지합니다. 그들이 누리는 힘과 평안함은 절대로 짧지 않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오히려 더 잘 살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과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재산은 나날이 늘어가고 가정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또한 평안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욥이 분명히 아는 것은 그들의 이와 같은 삶의 행복이 그들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그들과는 분명히 다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들을 보면서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악인이 형통하다는 욥의 말은 앞서 말한 소발의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악인이 부와 형통함을 누린다는 욥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그 형통함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다.
악인이 형통함을 누린다고 해서 그러한 삶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 하는 이들의 인생 목표는 분명히 다릅니다. 욥은 삶의 목표가 그들과 다르다고 확신했지만, 다만 고난 앞에서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우리 인생의 목표는 형통함이 아니라 순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