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영어로 ‘개인’이란 의미의 ‘individual’은 원래 ‘나눌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한 명의 개인이 어떤 의지를 가졌다면 당연히 그는 그 의지에 맞는 행동을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과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믿음과 행함이 나뉘고, 믿음 대로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천하는 자를 따르라(39~45절)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는 ‘실천’이라는 주제로 수렴됩니다(참조, 마 7:21). 특히 누가복음은 ‘누구를 따를 것이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즉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따를 것이냐, 사도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따를 것이냐의 문제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맹인 선생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십니다(39절). 40절을 개역성경은 ‘높지 못하나’라고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단순히 두 문장을 붙이는 접속사만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즉 ‘제자는 선생보다 높을 수 없다. 완벽하게 배우면 그 선생과 같은 수준이 될 뿐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맹인 선생을 따르면 맹인이 될 뿐,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40절).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해 그것을 빼지 못하는 자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자격이 없습니다. 이는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자가 남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42절). 그리고 이 선생이 맹인인지, 그 눈에 들보가 있는지 여부를 구별하는 방법은 열매 곧 행실을 보는 것입니다. 말이나 학위나 유명세가 아니라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43〜45절). 즉 우리는 ‘그럴듯한 말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실천하는 사람’을 따라야 합니다. 겉만 치장할 뿐 실제로 삶으로 보여 주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서는 안 되고, 외식하는 선생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평지 설교의 결론입니다.
실천으로 기초를 다지라(46~49절)
산상수훈과 마찬가지로, 평지 설교의 결론은 믿는 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46〜47절; 마 7:24〜27). 믿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주추를 놓고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탁류가 부딪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탁류가 부딪히면 곧 무너집니다(48〜49절). 이는 건기에는 물이 없어 마른 땅처럼 보이지만 우기가 되면 큰 강으로 변하는 강인 와디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건기에 와디를 보면 평평하게 정리된 땅처럼 보입니다. 우기에 물이 휩쓸고 지나가기 때문에 그 바닥이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집을 지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기가 되면 그 위의 모든 것이 쓸려나간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집의 기초를 지반 위에 두지 않는 것은 비상식적 행위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이 없으면 없을수록 작은 충격에도 무너집니다. 말로만, 마음으로만 믿는 성도는 사실상 신앙을 가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하루를 돌아봅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닮기 위해 어떤 노력과 실천을 하고 계십니까? 하루에 단 한 가지라도 주님이 하셨을 것 같은 일을 실천해 봅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행위는 사실 ‘배신’ 곧 믿음을 저버린 것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눌 수 없는(individual) 믿음과 행위를 억지로 나누는 자기 정당화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을 엉뚱하게 해석하여 궤변을 늘어놓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 예배하며,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를 믿음대로 살겠다고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다짐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