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15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18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19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20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욥을 꾸짖었던 소발은 그래도 자신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가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욥이 탄식할 때 사용했던 표현들을 가져다 대응하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가 위로자의 태도보다는 문제를 바로잡으려 가르치는 자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발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죄악을 깨닫고 환난을 잊으리라(12-16절)
소발은 이전까지 이어 왔던 자신의 발언을 “허망한 사람은 마치 들나귀처럼 지각이 없다”는 말로 마무리하는데, 결국 욥이 허망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12절). 그리고 “네 마음을 바로 정하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13a절). 이는 욥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탓한 것에 대해(참조, 10:13). 재앙의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지 않고 욥의 마음에 있다고 받아친 것입니다. 소발은 욥이 자신의 죄를 잊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주님을 향해 손을 들면 죄악이 생각나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13b-14a절). 욥이 분명히 죄를 지었다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깨닫지 못하는 불의가 있기에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14b절). 앞에서 욥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참조, 10:15). 이에 소발은 그가 죄 문제를 해결하면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며(15절) 환난을 기억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욥이 ‘죄를 기억하지 못해' 환난을 당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버리면 ‘환난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회복되리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소발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오묘하다며 상당히 모순된 말을 했었는데, 결국 마지막에 제시하는 해결책은 오묘하다기보다는 진부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지혜가 오묘해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이렇게 그 지혜를 온전히 깨달은 듯 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회복의 소망을 논하다(17-20절)
소발은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 광명도 흑암 같다”(참조, 10:22)는 욥의 탄식에 반박하면서 욥이 죄악을 기억하면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고, 어둠에 있어도 아침처럼 되리라고 선언합니다(17절). 욥이 지금은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있지만, 안전과 휴식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18-19절). 소발은 마지막 말에서 ‘악한 자들’을 언급하는데, 이는 욥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만약 욥이 계속 자기의 입장을 고집하면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죽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게 된다는 경고입니다(20절). 지금까지 소발의 말을 요약해 본다면, “욥의 무죄 주장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죄를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 죄악이 생각날 것이다. 그때 그 죄악을 던져 버리면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아냐, 너는 죄를 지었어. 기도하면서 잘 생각해보면 네 죄가 생각날 거야. 죄가 생각나면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라”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진리이지만, 현실 가운데 깊이 숙고하지 않은 채 적용한다면 진리가 오히려 어리석음의 재료가 됨을 인식해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공정한 판결을 구했지만, 소발은 하나님의 ‘오묘함’을 내세웠고(참조, 6절),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오묘하다고 주장한 소발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뿐 아니라 그분의 지혜와 지식도 모른다는 사실만 드러냈을 뿐입니다. 참 지혜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며, 자기의 얄팍한 지식을 자랑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바른 지식을 갖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