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 받은 요한의 사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갖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요한(1〜2절)
요한이 활동했던 시대는 로마 황제 디베료의 시대였습니다. 그때에 유대 땅에는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가 차례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종교 권력을 등에 업고 유대 지역을 통치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통치자, 제사장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들에 머물렀던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그는 통치자들의 궁궐이나 제사장들의 성전이 아니라 광야에 거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힘과 화려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광야에 임합니다. 모세 역시 광야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또 많은 선지자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후에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광야’는 언제,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세례(3절)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요한은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가 전했던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입니다. 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 사함을 예비하는 길이 회개의 세례라는 뜻입니다.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죄 사함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납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회개로 나아가는 세례를 요한은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죄 사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결코 다른 이들의 죄를 사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4〜6절)
요한의 사역에 대해 누가는, 구약성경의 이사야서에 기록된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사야서 40:3〜5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요한은 이 예언대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외치는 자의 소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기 전에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들이 낮아지며,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질 것임을 알렸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을 회개했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시간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모든 섬김과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한 수고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나 힘을 드러내기 위함도 아닙니다. 오직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거짓 가르침과 이단들은 이 기준에서 거짓으로 드러납니다. 인생 자체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일 때 그 삶이 의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