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9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10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11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12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13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14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16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17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18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으니
19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20 모든 들 짐승들이 뛰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내느니라
21 그것이 연 잎 아래에나 갈대 그늘에서나 늪 속에 엎드리니
22 연 잎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그를 감싸는도다
23 강물이 소용돌이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 물이 쏟아져 그 입으로 들어가도 태연하니
24 그것이 눈을 뜨고 있을 때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것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공통적으로는 욥의 항복으로 끝납니다(38:1〜40:5; 40:6〜41:34). 첫째 말씀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면, 둘째 말씀에서는 사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나을 수 없다는 사실이 확증됩니다. 성경에서는 ‘2’가 증인이나 증언을 상징하는 숫자인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 제시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성이 확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절대성을 드러내시기 위해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불의하신가(6~14절)
성경에서 ‘의로움’은 ‘관계를 지킨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습니다. 욥은 자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켰는데, 즉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행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 즉 불의하게 행동하셨다고 주장했었습니다. 하지만 첫째 말씀(38〜39장)에 의해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영역에서 욥에게 의로움을 지키고 계셨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말씀에서, 욥이 자신을 의롭다 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부정한 것에 대해 지적하십니다(8절). 욥이 자기는 의로웠는데 하나님은 의롭지 않으셨다고 주장하려면, 그 이전부터 욥과 하나님이 동등한 입장에서 주고받는 관계에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작 욥이 하나님처럼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밝히십니다(9절). 욥과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욥에게 일방적 은혜를 베풀고 계셨을 뿐입니다. 욥은 그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을 뿐이었는 데도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계속 물으시고(10〜13절), 그의 힘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14절).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은혜를 받고 있을 뿐이면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과연 인간이 가장 존귀한가(15~24절)
베헤못이 구체적으로 어떤 동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어떤 동물보다 크고 강하며 사람도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초식동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헤못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고 평가받습니다(19절). 피조물 중에 으뜸은‘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아니라 베헤못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태도를 꼬집는 표현입니다. 인간은 자기들의 풍요와 발전을 위해 세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는가?’라며 원망합니다. 욥기는 이런 교만함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자기들이 가장 보배로운 존재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으신다는 이유로 불평하며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우셔야 할 분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교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니 하나님은 당연히 나를 지키셔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조금 변형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를 원망하고, “내가 이렇게 힘든데 교회는 아무 일도 안 해 준다”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는 이런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 없어야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