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앞에서 엘리바스가 자기가 개인적으로 체험한 환상에 근거하여 주장을 펼쳐 나갔다면, 두 번째 친구 빌닷은 자신이 지금까지 익히고 배운 전통에 근거하여 주장을 펼쳐 나갑니다. 그러나 빌닷 역시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어정쩡한 결론을 내리고 맙니다.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라(8-10절)
엘리바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빌닷이 욥을 찾아온 이유는 어려움을 당한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욥을 책망하고 정죄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빌닷은 옛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8절). 왜냐하면 인간이 짧은 인생 가운데 배울 수 있는 지식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지혜보다 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9절). 사실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빌닷의 말 역시 그 자체만 떼어 놓고 본다면 나름대로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과연 사람들이 오랫동안 축적한 지식과 지혜라고 해서 어떤 상황에든 다 적용할 수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되어 검증된 지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에 적용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을 잊어버렸다(11-19절)
빌닷은 왕골과 갈대가 진펄에서는 무성하게 자라나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면 순식간에 시들어 버리는 것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결국 욥이 이전에는 크게 번성했지만 ‘물이 있는 진펄’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기에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망했다는 주장입니다(11-13절). 빌닷은 또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욥을 조롱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욥이 믿는 것과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같이 허망하여 그의 집이 서지 못하며(14-15절), 나름 햇빛을 받아 뿌리를 내리고 번성한 것 같아도(16-17절), 그곳에서 뽑히면 마치 뽑힌 왕골과 갈대처럼 시들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빌닷은 자기가 확신 가운데 붙들고 있는 오래된 진리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결국 욥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결론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빌닷이 확신하고 붙들고 있는 진리가 친구를 위로하려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내고 있습니다.
허술한 결론(20-22절)
그러나 빌닷도 욥이 당대의 의인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욥 당신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는 식으로 슬그머니 수습하며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욥은 순전한 사람이기 때문에(20a절)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결론으로 수습한 것입니다(21절). 그러나 빌닷의 마무리는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에서 벗어나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고 말하며(20b절) ‘너를 미워하는 자’와 ‘악인의 장막’을 저주하는 것으로 말을 마무리합니다(22절). 즉 의인인 욥은 회복되고, 악인은 재앙을 당하리라고 얼버무립니다. 하지만 지금 욥이 악인과의 갈등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기에 빌닷의 말은 전혀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빌닷이 신봉하던 ‘전통에 근거한 정의’는 ‘악인’이 특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악인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는 엉뚱한 결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지식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며, 전통을 따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절대 진리라는 생각은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가진 제한된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식의 교만한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