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3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4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5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6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빌닷의 말 이후에 이어진 욥의 탄식은 하나님이 자기를 정의롭게 대하지 않으신다는 고발이자 항변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아마 사람 소발이 엘리바스, 빌닷과 마찬가지로 욥의 탄식을 문제 삼으며 욥을 지적하고 책망합니다.
너는 말이 너무 많다(1-3절)
소발은 욥이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그저 듣기만 하려 했는데 욥이 말을 많이 하기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고(2a절) 말이 많은 자는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2b절). 소발은 욥에게 ‘말이 많다’고 지적했기에 자기도 많은 말을 하게 된 상황에 대해 변명합니다. 욥이 자신을 충동해 자신이 말하지 않을 수 없고(3a절), 욥이 엘리바스와 빌닷을 비웃었기에 꾸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3b절), 소발을 비롯한 친구들은 애초에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기에 당연히 욥의 탄식을 들어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욥의 신세 한탄을 듣고 말이 많다고 면박을 주고 꾸짖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발 역시 나름대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겠지만, 역시 아픔을 당한 친구를 위로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남을 탓하는 오류만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죄를 잊게 하셨다(4-6절)
소발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욥의 주장에 주목합니다(4절). 소발이 보기에도 욥의 격정적인 토로가 사람들을 속이는 말 같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소발은 욥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면박하지 않고, 하나님이 ‘오묘한 지혜와 광대한 지식’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다”고 주장합니다(5-6절). 소발 역시 재앙은 죄 때문이라는 확신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의 무죄 주장도 거짓으로 보기 어려웠기에 ‘욥이 자기 죄를 잊는 은혜를 얻었다’는 묘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는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기에 사람이 자기 죄를 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일깨우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죄를 잊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죄를 잊게 하셨다면 그건 은혜가 아니라 저주이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욥의 주장을 지지하게 되는 아이러니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묘하시다(7-11절)
논리적으로 보면 소발의 말과 태도는 모순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오묘함’이라는 말로 덮고 있습니다(7절). 엘리바스가 자신의 환상 경험에, 빌닷이 전통에 근거를 두어 논지를 전개했다면, 소발은 논리를 뛰어넘는 ‘오묘함’을 근거로 내세운 셈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재앙을 주시지 않는데 의인 욥이 극심한 재앙을 당했고, 욥의 무죄 주장은 거짓이 아니지만 욥의 말이 맞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을 ‘하나님의 크심과 오묘함’으로 슬쩍 넘겨 버리는 것입니다(7-9절). 소발은 하나님이 욥을 잡아 재판을 여셔서 욥의 악한 일을 다 보셨다고 말하는데(10-11절), 과연 이 재판이 옳은지 의심이 듭니다. 지금까지 그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재판은 선명하게 규정된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묘함’에 의해 이뤄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지만 ‘오묘함’이라는 표현으로 결국 자기는 하나님에 대해 모른다고 고백하는 모순에 빠지고 있습니다.
소발이 이런 모순, 역설의 논리에서 빙빙 돌고 있을 때, 욥은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체험한 지혜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돕고 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