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3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4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5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6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9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11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어떤 학자들은 26:5 이후를 빌닷의 말이라고 봅니다. 25장이 너무 짧고, 25:6과 26:5을 이어서 읽어 보면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는 학자들은 26:1〜4이 필사 과정에서 삽입되었거나, 빌닷의 말을 끊는 욥의 대꾸라고 봅니다. 하지만 누가 말했건, 오늘 본문은 ‘지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헛된 것’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1~4절)
1~4절은 욥이 한 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1절). 욥은 빌닷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음을 상기시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빌닷 뿐 아니라 세 친구의 말과 행동이 모두 욥을 돕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2절). 이들은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자기 지식을 자랑하려 했을 뿐, 어려움에 처한 욥을 돕기 위해 그 지혜와 지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3절). 욥은 그들에게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라고 도전하고, 그 지식이 누구로부터 나왔는가, 즉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할 수 있는지 반성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4절).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돕는 데 사용되지 못한다면 참된 하나님의 지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지식을 뽐내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공허한 지식(5~10절)
5〜14절은 빌닷이 늘어놓는 ‘진부하고 의미 없는 지식’일 수도 있고, 욥이 빌닷의 말에 대해 ‘그래, 하나님이 어디든 못 가시겠으며, 무엇인들 못 하시겠느냐’라는 의미로 답변한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화자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은 뭐든지 하실 수 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갈 수 없는 바다 밑, 죽은 자의 영들이 모인 곳까지, 그보다 더 깊은 스올까지 감찰하십니다(5〜6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땅을 매다시며, 구름을 물을 담는 부대처럼 사용하셔서 하늘의 물을 담으시고(7〜8절),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가리실 수 있습니다. 땅이 아니라 물 위에도 경계를 그으시고, 어둠과 빛을 함께 끝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9〜10절).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삶에서 체험하지 못하고 그저 정보에 그친다면 그 지식은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 알 수 있는가(11~14절)
앞에서는 바다, 구름, 달 등의 보이는 대상을 언급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실제로 볼 수 없어 존재 자체가 불확실한 것을 언급합니다. 하늘기둥(11절), 상상 속 괴물인 라합, 날렵한 뱀(12〜13절) 등이 언급되면서 하나님은 그 모든 것보다 더 강하시고 그것들을 이기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실제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말의 결론은 “누가 능히 헤아리랴?”(14절)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자신의 삶과는 관련 없다면 공허하고 의미 없는 신앙고백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하나님의 뜻’이라거나‘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말을 숙고하지 않은 채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자기를 경건하게 보이고자 하는 이들일수록 ‘하나님’이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립니다. 숙고하지 않은 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할 때에는 뭐든지 가능하시다고 만 하면 되고, 사랑을 말할 때에도 무조건 사랑하신다고 하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를 견지한다면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좀 더 말씀에 근거하고, 좀 더 삶으로 체득된 신앙고백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