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27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엘리바스는 지금까지 자신의 지혜와 생각대로 욥에게 고난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욥에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권면합니다.
징계받는 자(17-22절)
욥에 대한 구체적 권면은 시편 1:1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과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목적은 회복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시지만, 동시에 아픔을 싸매고 상처를 고쳐 주십니다. 모든 환난과 재앙에서 구원하시며 지켜 주십니다. 기근에서 살려 주시고, 전쟁에서 구원하십니다. 또 사람들의 중상과 비방에서 지켜 주십니다. 멸망의 두려움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징계인 현재의 고난을 거부하지 말고, 그 고난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엘리바스의 주장입니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으리라는 욥의 말은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이러한 논리는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죄에 대한 징계를 잘 받으라는 설명은 도무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감당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너무도 연약하기에 죄의 대가인 하나님의 징계를 견딜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도외시한 엘리바스의 논리는 욥에게 전혀 맞지 않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도무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없는 자임을 아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이사야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복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연구결과(23-27절)
엘리바스는 고난이 끝난 뒤에 어떤 회복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욥이 하나님의 징계를 잘 받는다면 그는 사업의 형통함과 가정의 평안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받고 장수하며, 모든 명예를 누리며 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지혜를 자신이 조사하고 연구했다는 말로 권면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자신의 경험과 많은 지혜자의 말을 토대로 한 권면이기에, 욥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징계받은 자를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말씀은 너무도 은혜로운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는 욥이 하나님의 징계를 잘 받고, 마땅한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한 어떤 의로움도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큼 죄의 대가를 완벽히 지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분명히 은혜의 말씀이며 소망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이는 절망의 말씀이 되고 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복이 선함과 의로움의 결과라는 매우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주장에는 욥을 위로하는 어떤 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짧은 지식으로 욥을 마음껏 정죄했습니다. 형통함은 사람의 의로움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